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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이야기

태국의 잊힌 국경일 - 6월 24일 혁명기념일

작성자
이상해요
작성일
2022-06-23 22:40
조회
111929

오늘날 태국의 국경일은 12월 5일 '아버지의 날'입니다
이날은 선대 태국 국왕인 라마 9세의 탄신을 기념하는 날인데요

국왕을 '생불'(生仏)로 섬기며 존경하는 태국답게, 라마9세 대왕의 생신을 '아버지의 날'로 지정해 국가 최대의 기념일로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마 9세 대왕의 생일이 태국의 범국민적인 축일로 승화된 것은 1960년부터의 일로
이는 라마 9세가 즉위한 1946년으로부터 14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까지 태국의 국경일은 언제였냐고요?
바로 6월 24일 '혁명기념일'이었습니다



본래 태국은 1932년 이전까지만 해도 전제군주국가였습니다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이었으며 동시에 태국 왕실의 수장이었습니다

내각의 주요 인물들도 민간인이 아닌 왕실 구성원으로 채워졌을 정도였지요



당시 태국의 국왕은 라마 7세였는데
그가 즉위한 1925년, 태국의 국고는 파탄 직전에까지 이르렀고

라마 4세, 5세 시절 국외로 유학 간 엘리트 계층의 자제들은 절대군주제의 벽 앞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라마 7세는 정부의 기능을 효율화한다는 명목으로 선대 국왕이 임명한 장관 12명 중 3명만을 남기고 모두 물갈이 하는 한편

정부 부처에 소속된 공무원을 대거 감축해 이들을 거리로 나앉게 했었습니다


이렇게 후진적인 정치제도를 갖고 있던 태국에서도 서구에서와 같이 의회를 개설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높은 문맹율과 사회제반시설의 부족으로 번번히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인, 외교관 7명이 모여 회동을 갖습니다. 그중에는 법학도인 쁘리디 바놈용(사진 왼쪽)과 포병 대위 출신의 쁠렉 피분송크람(사진 오른쪽)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국의 민주화를 기도하고 전제왕정을 무너뜨려 서구와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카나랏사돈>(태국 인민당)을 조직하고, 태국 내부에 실업 공무원과 군인, 지식인층을 규합해 혁명을 추동할 세력으로 조성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태국을 민주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쿠데타'를 고안해냈습니다.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 태국의 문맹율이 대단히 높고, 국민교육이 제대로 보편화되지 않아 프랑스나 미국과 같은 민중혁명 형식의 민주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결국 군대와 엘리트가 결탁해 '위로부터의 개혁',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32년 6월 24일, 혁명선언문을 낭독하는 군인들)


그리고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가 태국에까지 닥치면서 태국 경제 또란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됐습니다
디플레이션으로 물가가 하락해 세수가 급감했고, 국방예산까지 감축되는 바람에 군 장성의 진급 또한 연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제적 혼란 속에서 금본위제까지 포기한 태국은 정부 예산 규모를 3분의 1로 줄이고, 그만큼 공무원과 정부 직원을 대거 해고해 실업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더욱이 쿠데타가 일어난 1932년은 태국 왕조 개창 150주년이 되던 해로, 민간에서는 이 해에 뱀의 저주가 닥쳐 왕조가 멸망할 것이라는 미신이 널리 퍼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32년 6월 23일, 라마 7세가 별장에 휴가를 떠난 틈을 타 인민당 혁명지도자들은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왕궁 앞에 도열한 태국 군인들의 모습)


6월 24일 새벽, 군부측 대표이자 왕실 근위대 장교 출신인 피분 송크람이 이끄는 군대가 탱크를 몰고 왕궁과 주요 관공서를 포위했고 정부 관료들을 일제히 체포했습니다. 쁘리디 바놈용의 명의로 된 혁명선언문이 곳곳에 뿌려졌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팟흔은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소(疏)를 라마 7세의 앞에 보냈습니다


이미 라마 7세는 여러 핑계를 대며 헌법 제정을 거부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부까지 들고 일어선 상황에서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결국 6월 26일, 라마 7세는 헌정을 약속하고 전제군주정을 좌지우지하던 추밀원과 최고평의회를 폐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동년 12월에는 태국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지요.



(1941년 6월 24일, 태국 혁명기념일을 축하하는 포스터)


이후 혁명이 일어난 6월 24일은 태국의 국경일로 됐습니다. 6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내리 연속으로 공휴일이 되었고, 수도 방콕에서는 열병식이 거행됐으며, 라디오에서는 인민당의 혁명을 찬양하는 특별 방송과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1932년의 혁명은 파란곡절의 역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혁명을 주도한 쁘리디는 은행 국유화, 사회보장제도 도입 등을 강력히 주장하다 군부와 인민당 보수파 세력의 견제를 받아 혁명 1년만에 정계에서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혁명 이후 3대 총리에는 군부 쿠데타를 주도한 피분 송크람이 취임했는데, 이를 계기로 군인이 총리를 역임하는 태국의 독특한(...) 군부통치문화가 형성됐습니다


한편 1957년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갓 서른이 넘은 젊은 라마 9세 내외를 정치적 상징으로 활용하게 되면서 오늘날 국왕 숭배 문화의 근간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혁명기념일인 6월 24일이 폐지되고 대신 국왕 탄신인 12월 5일이 국가경축일로 지정된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결국 태국 특유의 근왕주의적 문화와 왕실 숭배는 군부 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기인하고 있던 셈이지요.



6월 24일이 평일로 환원되면서 1932년 태국 혁명의 의의와 정신을 고찰하려는 시도 또한 무마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저 태국 헌법이 제정된 1932년 12월 10일만을 헌법기념일로 지정해 휴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한편 2014년 쿠데타 이후 태국 전역에서는 1932년 혁명의 유적을 파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시도가 정권 차원에서 거행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혁명을 주도한 쁘리디, 피분 송크람, 쁠렉 등의 동상이 철거되고, 1932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민주기념비(위 흑백사진)의 동판도 왕실의 업적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교체됐지요.


오늘날 6월 24일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일부 재야 시민단체의 집회일 정도로서의 의미만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 그대로 집권 정치세력에 의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왜곡되고, 또 은폐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8.15 해방을 의도적으로 띄워 3.1운동의 건국사적 의미와 축제적 성격을 감춘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전체 2

  • 2022-06-26 12:09

    지금 태국에서 군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이 혁명의 영향이 컸을텐데
    그 역사를 가려버리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왕실이 강조되는 것도 마치 여전히 전제군주정에 둘러싸인듯한 느낌을 줍니다(?)


    • 2022-06-26 17:07

      1992년 라마 9세 대왕이 군부독재자 수찐타 총리를 대면한 뒤 총리가 사임하면서 형식적 군부독재가 막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이 이후로 태국 왕실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하늘을 치솟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태국 국왕이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된 것도, 왕실모독죄가 유달리 대두된 것도 이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 이전까지는 왕실을 강조하긴 했어도 지금처럼 열렬한(?) 수준은 아니었고 오히려 태국 혁명이 일어났을 때처럼 왕실에 대한 민중의 원한이 드높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와는 별개로 '국민주권과 민중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보니, 그 이후에도 군인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데 큰 한계가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