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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가상 대한민국 역사 설정 (1.0)2022-01-26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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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전의 대한민국 역사는 현실 대한민국의 역사와 동일합니다. 본 문서에서 서술하는 대한민국 역사는 1942년 이후의 일을 다룹니다.)

 

1942년, 미국 의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이후 미주 내 한인 단체의 통합과 이들의 열띤 활동을 통해,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국인을 대표하는 망명 정부로 공식 승인하고, 임시정부와 합동으로 한반도 탈환 작전을 계획하게 되었다. 1945년 초, 미국 OSS와의 합동 작전인 <독수리 작전>이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광복군은 미군과 더불어 제주도 수복을 시작으로 한반도 북부를 향해 북진하기 시작, 이 과정에서 광복군은 한반도 남부 일대의 군사 시설과 주요 일본인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이어가며 내지 한국인의 독립봉기를 선전했고, 이에 대한 열띤 호응이 일어나 광복군과 임시정부를 원조하는 민중봉기(을유독립전쟁)가 곳곳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후 1945년 7월, 광복군과 미군은 서울 일대로 진격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고, 동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조선총독부로부터 완전한 통치권 인계를 이루어냈다.

1945년 8월 16일, 통치권을 위임받은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명의로 조국의 광복을 선언, 각 지역의 민중들로 하여금 일제의 지방행정과 치안을 대체할 자치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할 것을 홍보했고,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지역 유력자와 청년을 위시로 한 위원회가 속속 결성돼, 임시정부 전체가 환국하기까지의 행정력 공백을 매꾸었다.

 

(이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있어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1945년 9월 11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일제 귀국한 뒤 첫 개선대회가 서울에서 거행되었고, 이후 일본군의 완전 무장 해체가 완료됨과 동시에 임시정부는 독립선언 30주년인 1949년 완전한 헌정 실시를 목표로 3년 반 동안의 훈정을 선언하였다.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전국 각지의 정당과 사회단체, 직능단체 대표를 소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능을 과도정부에 이양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듬해 1월 1일, 대한민국 과도 정부의 수장으로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와 부주석 몽양 여운형이 선출됐다. 과도정부 통치 기간 동안 제헌 국회 선거가 열렸고(46년 7월), 그렇게 구성된 제헌 국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 주요 산업 국유화, 농지개혁, 적산 몰수 등 주요 건국 사업과 더불어 구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대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8년 4월 11일, 제헌 국회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헌법>이 공식적으로 공포되었고, 그 시행일은 49년 3월 1일로 명시되었다. 48년 8월 1일, 한국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공식 전환되었고, 동년 11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부통령을 김구 선생으로 선출해, 1949년 3월 1일, 공식적인 헌법 시행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 건국을 달성하게 되었다.

 

<독립 이후>

 

독립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소련으로부터 경제 개발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동아시아에서의 완충지대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1956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경공업, 농업, 사회인프라 구축을 중심으로 한 초기 경제개발이 시행되었고, 또한 삼림녹화 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제2차 경제개발 계획 단계에서부터는 소련의 콤비나트, 협동농장 제도를 도입해 국가 주도의 중화학공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국영기업이 주도하는 공업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1960년대 초반부터는 <건국 제2기>를 넘어 복지국가를 완성해 나가는 <건국 제3기>에 접어들었음을 선포하고, 사회안전망 체계를 갖추는 국가적 사업 또한 함께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는 전자, 조선, 중화학 공업 등 중공업 영역에서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는데, 초기에는 외자의 유치와 구미권 기업의 동양 생산 기지로서 출발했으나, 이후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진력, 오늘날의 반도체, 기술 강국 대한민국의 기반이 이때 성립되었다.

한편 1950년대 대외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정치계에도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과도정부 수립을 거쳐 정식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건국사업에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 투입하게 하고저, 당시 임시정부는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정당단체연합체로 통합, 각 정파의 인사를 정부 요직에 고루 등용함으로써 민족대단결 정책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계열 정당이 민족대단결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고 독촉회를 탈퇴하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한국독립당 본위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진보, 좌파 계열 정당 및 사회단체가 독촉회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인민당이, 1969년에는 인민공화당이, 1971년에는 보수 계열 민주당이 독촉회를 탈퇴했다. 1973년 천도교청우당이 독촉회를 탈퇴한 것을 계기로 제정당사회단체연합정권 체제가 막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본격적인 다당제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은 1970년(민국 52년) 서울아시안게임, 1979년(민국 61년) 건국60주년 기념 세계평화박람회(인정박람회), 1986년(민국 68년) 서울아시안게임, 1988년(민국 70년) 서울올림픽, 1993년(민국 75년) 대전엑스포, 2002년(민국 84년) 한일월드컵, 2012년 나진엑스포(인정박람회), 2014년(민국 96년) 인천아시안게임, 2018년(민국 100년) 원산동계올림픽 등 여러 국제 규모 스포츠 및 대형 이벤트를 개최함으로써 세계에 그 위상을 널리 떨쳤다. 문화적으로는 1980년대 이후부터 텔레비전 방송, 영화, K-POP, 애니메이션, 만화, 음식 등 여러 문화콘텐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한류, k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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